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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커-자유소프트웨어문화


1. 들어가며

1.1. <두려움의 대상들>

  1. 이 위키와 관련된 토론이 [http]http://bbs.kldp.org/viewtopic.php?t=60196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 이 page는 올바르게 naming된 것인가?
    위키 이름에 - 가 들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규칙을 깨는 데는 이유가 필요합니다. (NoSmoke:BreakTheRulesWhenItCompensates)

    이름은 변경가능한가요? 하이픈은 허용이 되는줄 알았습니다. 좋은 이름으로 바꿔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3. 이 page는 올바르게 categorize된 것인가?
    이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
  4. 이 page의 서식은 과연 어디로 실종된 것인가?
    서식도 언제든지 바꾸실 수 있습니다. 제가 좀 바꾸기도 했구요 -- hey

    핫. 정말 멋지게 바뀌었네요. hey님 ㅤㅊㅚㄱ오! >.<;=b
  5. 이 글은 과연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인가?
  6. 이 글은 어떤 모양새를 지향할 것인가?

위와 같은 의문들을 가지면서 page를 개설합니다. 계속 주저하고 있기보다는 한발짝 내딛는다는 가벼운 기분입니다.

이 장에서는 왜 이런 글을 시작하려했는지를 설명하고 앞으로 어떤 모양새가 되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1.2. 경어를 사용하기로 한 이유

제목을 "한국해커-자유소프트웨어문화"로 정한 이유와 닿아 있습니다. 역사라는 딱딱한 느낌보다는 "문화"라는 좀더 부드러운 어감이 좋았고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문화"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은 작업은 "기술"이 아니라 "묘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역사"같은 연대표가 연상되는 작업이 아니라, 마치 현장을 묘사하듯이, 한국 해커, F/OSS문화의 시간대를 따라가보며 방청 혹은 관찰이라도 한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의미전달도 어렵게 꼬아져있지만, RevolutionOSCodeLinux같은 다큐멘터리물이 이 wiki page의 목표, 혹은 제 의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나레이터는 경어로 진행하고, 인터뷰 혹은 회상신은 경어를 생략하는 형태가 어떨까 생각해본것일 뿐입니다.

1.3. 제목을 선정하게 된 배경

이 글을 시작하게 된 이유와 닿아 있습니다. 리눅스로 대표되는 한국 F/OSS문화를 재밌는 이야기, 구전동화처럼 엮어보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리눅스 이전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고유의 Hacker역사, 문화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컴퓨터라는 것이 처음 도입된 시점까지 거슬러올라갈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컴퓨터 입문서의 시작꼭지가 에니악이야기에서 PDP series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page가 연표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더 다른, 뭐랄까 살아있는 모습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아주 큰 바램입니다.

1.4. 이런 글을 시작한 이유

그동안 저는 F/OSS의 사용자, 소비자역할만을 충실히 담당해왔습니다. 외국의 사례나 일화들을 보면서 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도 자생적인 Hacker문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뒷 이야기들이 참 흥미롭고 즐거운 무언가가 될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KLDP bbs에서 꺼내봤다가 이렇게 생뚱맞은 글을 적게까지 되었습니다.

1.5. 이 글의 범위

물론, 무릇 남을 것은 남고, 흘러갈 것은 흘러가는 법이라서, 이 글도 그냥 단지 수없이 쏟아지는 information속에 garbage로 사라지게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존에 이와 유사한 형태의 글들이 on/off-line에서 많이 있어왔다는 사실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csh이 있다고 bash를 안만들쏘냐? 수준의 유치찬란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가볼 요량입니다. 이 글은 한국의 전산역사를 통째로 아우를 계획입니다. 당연히 가능한 한! 음지의 이야기들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hacker의 이야기들도 담을수 있다면 보다 더 즐거울 수 있을것 같습니다. 형태는 기간과 category를 나누고, 그 각각은 나래이터와 interviewee의 대화형, 혹은 당시 생존자분들의 회고형태로 채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장과 절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도 이거다 싶은게 없군요. 일단 여기까지로 해서 만들어 올려보겠습니다.

2. 의견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로 분류하는것은 어떨까 싶습니다만... 각 분류대별로 category를 나눈다면 어떤게 있을까요? 또, interviewee 희망자분들도 올려주세요.

iolo님과 warpdory님의 회고록부분을 쪼개서 올려도 괜찮을까요? 아니, 쪼개는 것이 바람직할지 하나의 회고코너로 하는 편이 나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 일단 쪼개서 넣어 봤습니다. 반응을 보고 undo를 하던지 해야겠네요...^^;;;

Codelinux인가 외국 다큐멘터리나 기타 전산관련 다큐멘터리 특히 역사부분들을 보면 어떤 계기를 웨이포인트로 선정해서 차근차근 훑어 나가는 식의 모습을 많이 봤는데요... 우리나라역시 굵직굵직한 사건 혹은 인물(ex.10대 해커) 그런것들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는건 어떨까요? 어렸을적 읽었던 어렴풋한 해커를 대상으로 한 소설책들을 보면 흥미진진한 내용들도 많더라구요 예를들어 해커즈랩 등에서 보이는 명예의 전당에 있는 유명인들에 대한 에피소드처럼말입니다. -- mirr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웨이포인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포럼에 주관식투표를 진행해보시는건 어떨까요? 재밌을것 같습니다.

interviewee 희망자 :

3. 연대기적 기술


3.1. 한국 전산의 태동기

  • 82년.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 개통

    1982년 3월 2일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의 중형 컴퓨터 PDP 11과구미에 있었던 전자기술연구소(KIET)의 중형컴퓨터 VAX 11/780을 1200bps 전용선으로 연결한SDN이 개통되었다. 인터넷의 시초인 이유는 SDN이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는 TCP/IP 및 FTP, Telnet 등의 응용 프로토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 83년. 마소창간
    • 주옥(?)같은 글들
      • 89 ?. 최철룡, 도깨비 한글
      • ???. 이찬진, 한글글꼴에 관련된 글 연재
      • 90.1. 안철수씨 V2PLUS 소스 공개

  • 83년. '한글 Mail System의 개발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 논문 (손갑철, KAIST) 발표

  • 85년. 한글 전자 우편 프로그램(Sendmail의 한글화 작업, KAIST 최우형), 한글 에디터 hvi 개발


  • 86년. 한국과학기술대 김창범 네트워트 해커공동체 유니콘 결성 – 88 해산 여상

  • 86년. 천리안 서비스 시작

  • 91년.12월. KAIST. 한글 전자메일 프로그램인 '한글elm'을 개발.

    이 때 사용된 한글 인코딩 방식을 발전시켜 "Korean Character Encoding for Internet Messages" 라는 제목으로1993년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인 IETF의 RFC 문서를 등록하였다.

  • 92년. 하이텔 서비스 시작 (케텔은 88년부터 서비스 시작)
    • 기억에 남는 동호회들
      • 게오동
      • 리눅스 동호회
      • OS동

3.2. PC 천국의 시기 (80년 ~ 90년대)

3.2.1. 8 비트 시절

KLDP에서 활동하시는 나이 지긋한(!) 분들에게는 추억의 장이, 그리고, 8비트 시절을 건너뛴 분들께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자, F/OSS란 말이 머언 이국땅에서 시작될 무렵 우리의 선배들은...



iolo kldpbbs

82~83년이었던 거 같습니다.

아득한 옛날... "지경사"의 "BASIC게임 모음집" 1,2,3을 키보드로 타이핑해서 넣고 콘솔(?) 게임이랍시고 즐거워했던 시절... 그냥 비싼 장난감으로써의 PC였습니다. 제가 PC와 처음 연을 맺은건 당시로썬 생소했던 전산 전공의 형의 영향이 컸습니다. 거기에 다니던 중학교에 과학교보재랍시고 "과학상자"와 함께 "FC-30"이 십여대 들어왔습니다. 그걸로 "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형이 사준 한수찬교수의 "애플입문II+"와 "애플어셈블리"로 고달픈 저의 PC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한수찬교수님께 감사를 드려야할지 원망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lol)
3.2.1.1. Apple II 호환기종

iolo kldpbbs

83~87년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마소(microsoft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렇게들 쓰지만, 예전에는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를 마소라고 불렀습니다.)가 인터넷을 대신하던 시절이죠.

마소 외에 학생과 컴퓨터, 컴퓨터 학습(나중에 마이컴이된)등이 기억나네요.

당시의 유명한 해커들이 꽤 있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진듯 하네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안대혁, 유홍준, 류백현, 이충수, 김성수, 변성완... 정말 기억을 더듬어도 제목이나 내용은 기억나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나네요.(혹시 빠졌다고 서운해 하지 마세요... 제가 머리가 나쁜것일뿐)

500원주고 디스켓한장짜리 게임을 불법복사(당시는 500원이면 정품인줄 알았을지도..)하던 시절이었고.. 실제로 그걸 사업으로 삼던 회사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아래아한글로 유명해진 러브리소프트나 써드웨이브, 소프트빌리지같은 회사들이 사실 "회원제" 불법 소프트웨어 복사 업체였죠. 말하자면 오프라인 덩키같은...-.-; 그대로 이런 불법 사업 덕분에 게임의 복제방지 프로텍션 깨는 알바가 솔찮게 들어왔더랬습니다.

당시 제가 쓰던 애플은 당대를 주름잡았던 "로얄"(-.-;;컴퓨터의 애플복제품이었는데.. 마소의 광고모델이 "김희애"였던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그때는 누군지 몰랐고 나중에 보면서 그런가 했죠.(이 시절 마소 갖고 계신분 한번 확인해보시길...)

84년 초였던거 같은데 유홍준씨가 만든 엑스리온(오락실의 그것과 유사한)이라는 게임의 소스(물론 기계어 덤프 리스트입니다)가 마소의 1/3을 채우고 있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그걸 일주일 밤낮 타이핑해서(타이핑보다 틀린거 찾기가 더 힘들죠) 돌렸던 기억도 납니다 사실 청운 서림(전 대구사람입니다)가면 1500원주면 테이프로 살수 있었는데 말이죠^^;

당시 8비트 애플에서 쓸수 있던 한글이 몇가지 있었는데.. 추가장비없이... 기존 소프트웨어까지 문제 없이 돌릴 수 있었던 CALL 3327한글을 많이섰던거 같습니다. 이 녀석이 N바이트 조합형(기본적으로 요즘의 공한체와 유사한 컨셉입니다만)이었는데 소팅부터.. 화면 많이 차지하는 문제(가로 20자 세로 12자)를 해결하려고 무던히 삽질하던 시절이었던것 같습니다.

기울여풀어쓰기인가 하는 방법(86년인가...)을 제시한 기사도 있었는데.. 참 어처구니없지만 또한.. 기똥차다는 생각을 했었던거 같습니다.

마소에서 매년 마이크로 마우스 경진대회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고추2호"라는 로봇이 기억나네요-.-)b

warpdory kldpbbs

얼음땡, 술래잡기, 비석치기에 몰두하던 초등학교 4학년 어느날, 아버지께서 회사에서 싸게 컴퓨터를 판다며 애플 2+ 한대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애플소프트베이식 500 제.. 라는 두꺼운 책도 한권 같이 주시더군요. 동네에서 컴퓨터라는 걸 처음 가진 아이가 저였습니다.

1년쯤 그 책에 있는 예제들을 열심히 입력하고 .. 놀고 그러던 어느날, 4,5 집 정도 떨어진 곳에 살던 같은 반 친구도 애플 2 를 한대 구입합니다. 가서 열심히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때 제물포역 지하상가에 생긴 파인소프트라는 컴퓨터 가게를 알게 됩니다. iolo 님의 글에서도 나온, 500 원 받고 게임 복사해주던 가게입니다. 인천 살던 저에게 청계천(그땐 용산이 없었습니다. 지금 용산전자상가 자리엔 청과물 시장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이나 세운상가까지 가기는 너무 멀었었지요. 파인소프트에서 게임을 하나 복사해 와서 .. 집에서 돌리고 .. 친구랑 잘 놀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트웍에 눈을 뜹니다. 애플 2+ 의 뒷면에는 오디오 단자가 2 개 있습니다. in/out 단자인데, 이것을 서로 오디오 케이블로 연결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해보니 잘 되더군요. 이쪽에서는 bsave(binary save 기능입니다. 주로 게임을 다른 테이프에 저장할 때 쓰던 기능이죠.)시키고 저쪽에서는 bload(bonary load 기능)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컴퓨터를 들고(애플 2 는 들기도 쉽습니다.) 친구집에 가서 약 20 미터쯤 떨어진 곳을 오디오 케이블로 연결해서 전화로 하나.. 둘.. 셋 ! 해서 하니깐 에러가 뜹니다. 나중에 신호 감쇄니 .. 하는 걸 알게 됐지만, 당시에는 그게 왜 그런지 미스터리였지요.
3.2.1.2. MSX 호환기종
3.2.1.3. SPC-1000 호환기종
3.2.1.4. 기타

3.2.2. 16 비트 시절


iolo kldpbbs

86년~7년으로 넘어가면서 마소에 ibm-pc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던것 같습니다. 그러고 88년인가 89년에 "16비트 전문지 선언"을 하면서 8비트 기사들이 사라졌죠.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 8비트 기사는 7x11매트릭스에 한글을 우겨넣어서(!!!) 8비트 애플에서 가로 40컬럼을 구현한 Q한글 이었습니다.
마소 필자들을 기준으로 당시를 기억해보면:
임인건, 이준희, 류성준, 박흥호, 정내권.. 아 지금도 유명한 이찬진씨와 안철수씨가 등장한것도 이 무렵이었던 같습니다.

터보이빨(turbo28)로 이름 날리던 임인건씨의 벼게만한 책 "터보C정복"도 기억에 남네요. 당시 마소 기자셨던 분이 "달리만듦"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름의 출판 기획 전문회사를 만들어서 펴낸 "정복"시리즈의 일환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박진감 넘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찬진씨하면 유명하지만 이찬진씨가 마소에 처음등장한건 83년인가 84년에 애플 베이직으로 짠 숫자 사이에 콤마 넣어서 오른쪽 정렬하는(basic의 print using문) 서브루틴을 기고한거였다고 기억됩니다. 86년인가 누가 터보파스칼로 멀티윈도우(지금의 윈도와는 좀 다른.. 터보C 2.0기억하시는 분이라면 그것과 유사한)라이브러리를 기고 했었는데... 몇달후 이찬진씨가 이걸 개선한 기사를 내놓았었죠. 그걸 보면서... 햐 이 사람 독특한 재주가 있구나했던 기억이 납니다.(상당히 인상적이었나봐요 지금도 기억하는걸 보면) 그 무렵 저도 무슨 탁상용 계산기 프로그램의 도움말 출력 루틴을 보고 PC의 비디오메모리 구조를 알아내고는 팝업윈도를 구현하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의 화두는 PC에서의 한글 구현이었는데(마소가 특히 집중하던 분야죠)..

후일 표준이된 KS완성형도 없었던 시절이고 주로 삼보의 hp(나중에 thp, nkp가된프로그램)에서 사용하던 "상용조합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죠. 한글 글꼴 문제.. 입력기 문제.. 출력 문제.. 등등등 끝도없는 한글 이슈들이 나오곤 했었습니다. 전 당시 8비트 애플에서 16비트 PC로 이전하는 과정이었는데(애플에 대한 애정+경제적인 이유로 늦어졌죠) CP/M에 한글 구현한다고 삽질했던게 마지막었던것 같네요.

3.2.3. PC 통신 시절


iolo kldpbbs

제가 제일 먼저 접했던건 엠팔이었던 같습니다. 그리곤 잊고 살았는데... 88년인가 무렵에 갑자기 사설 비비에스들이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롱불과 인토크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나는 "표하사네 사랑방"도 문득 떠오릅니다.

그리고 케텔, 천리안...

케델의 두루물과 게오동은 OSC등이 기억나네요. 천리안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쓰는 거였습니다 -.-; 하이텔이 되기 전까진 말이죠.

컴퓨터학습은 "마이컴"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학생과 컴퓨터"는 망했죠. PC라인과 PC어드밴스라는 새 잡지도 생겼습니다.(이건 좀 더 나중인가요?) 개인적으론 이 시기가 단어 그대로의 PC (개인용 컴퓨터)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기도하고... 처음으로 컴퓨터를 통해 돈같은 돈을 벌어본 시대이기도 하지요.

warpdory kldpbbs

1990년대 초중반 정도까지가 아마도 공개소프트웨어의 절정기였었다고 봅니다.

하이텔(케텔 -> 코텔을 거쳐 드디어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여긴 갑부나 쓸 수 있었지요. 종량제라는 괴물로 인해서) .. 의 자료실에는 자기가 짠 프로그램과 소스들을 올려놓고 다운 받아서 문제점이 뭐고 … 이걸 좀 개선하면 좋겠다. 이런 글들을 매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 MdirIII, ls, 21세기 워드 등등… 물론, 소스까지 공개는 안했지만, 프로그램 자체는 공개였고, 나중에 상용화된 프로그램도 몇 개 있습니다.

김중태문화원 중태

정확하게 나누어진 것은 아니지만 보통 1988년부터 1990년까지의 시기를 통신 초창기로 잡고 있다. 초창기시절의 열악한 통신환경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당시에도 좋은 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전화요금이다. 1989년까지는 전화요금이 도수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때까지 아무리 오래 통화해도 무조건 한 통화이던 시기다. 이 때문에 통신인들이 통신망에 한 번 접속하면 도무지 끊을 생각을 안했는데, 밤새 파일을 받도록 해놓고 잠이 들고는 했다.

통신 초창기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호스트프로그램은 미국에서 만든 들고양이(Wildcat)와 RBBS라는 프로그램이다...한글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국형호스트의 개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국내 최초의 호스트프로그램이 '카페'다. 이 프로그램은 국산 호스트프로그램의 개발을 돕기 위해서 소스를 공개했는데, 오히려 이 소스를 분석한 해커들의 침입을 많이 받기도 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지방통신인을 기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을 하나 지니고 있었는데, 등록가능 인원이 300명으로 제한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지방의 통신인구는 몇 십명을 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300명이면 적은 인원이 아니었다. 90년도만 하더라도 마산이나 여수 같은 곳의 통신인구가 열 명을 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나 서울의 유명 벼락쪽들은 신규등록자만 일주일에 3백 명을 넘어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이 프로그램이 별로 쓰이지 못하고 사라졌다. 당시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던 내일(SF)과 같은 벼락쪽에서는 매일 매일 등록된 회원을 지우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소스를 기본으로 해서 기능이 보강된 호스트프로그램이 속속 개발되기 시작했다. 특히 실질적으로 국산호스트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알파라는 벼락쪽에서 만들어 내놓은 '호롱불'이다. 이 프로그램은 최오길님이 만드셨는데, 이분은 컴퓨터언어는 물론 컴퓨터에도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 없던 분이다. 더구나 혈기왕성한 학생들도 아니고 의류업을 하는 평범한 중년의 아저씨가 컴퓨터프로그램을 배워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로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최오길님이 존경스럽게 보였다. 최오길님도 다른 사람처럼 우연하게 통신을 접하게 되었고, 통신을 하면서 국산호스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로그래밍에는 문외한인 이분이 파스칼이라는 프로그램언어를 배워가며 조금씩 짜기 시작해서 사람들에게 선을 보인 것이 호롱불이다. 지금은 너무나 편하게 사용하는 호롱불 호스트가 이처럼 나이 든 분의 작은 열정과 소망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감동적이다. 안타까운 일은 호롱불을 이용해 국내에서는 최초로 전국적인 사설네트워크를 구성했는데, 호롱불네트의 중앙국인 알파1과 알파2의 두 남녀지기끼리 결혼한 후로는 예전만큼 열정을 쏟을 수 없어서 지금은 호롱불네트의 기능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이다.

벼락쪽 지기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프로그램이 호스트프로그램인지라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는 이 외에도 숱하게 많다. dBANK라는 멀티노드 호스트프로그램(여러 사람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호스트 프로그램)을 짠 분은 정재덕님인데, 이분이 호스트프로그램을 짜게 된 동기도 별스럽다. 당시 정재덕님은 멀티노드로 벼락쪽을 운영하기 위한 호스트를 알아봤는데 상업용 들고양이 프로그램이 멀티노드를 지원한다는 것을 알고, 그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신이 이 호스트프로그램을 복사해줄테니 돈을 몇 십만원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돈이면 새 제품을 살 수 있는데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디스켓 몇 장 복사해주면서 돈을 몇 십만원 요구하는 그 사람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직접 호스트를 짜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열받아서 직접 짜기로 한 셈이다. 그러면서 들고양이 프로그램의 새로운 판이 미국에서 나왔다고 하면 국제전화비를 물면서, 직접 미국의 무스탕사에 접속해 파일을 받아오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몇 십만 원을 투자해서 가져온 프로그램은 통신인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다.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수 많은 국산호스트가 개발되기 시작했고, 사설벼락쪽의 호스트는 카페와 호롱불이 나온 이후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현재는 수 많은 기능이 구현되고 한글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었기 때문에, 91년부터 사설벼락쪽에서는 영문을 한 자도 치지 않고 모든 기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형벼락쪽의 호스트는 아직도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하이텔의 전신인 케텔 시절에는 차림표 하나를 바꾸는데 며칠에서 몇 달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 까닭을 나중에 알아보니 차림표 하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케텔의 방대한 호스트프로그램을 전부 다시 컴파일(프로그램을 짜서 실행가능하도록 바꾸어주는 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차림표 하나 바꾸는데도 그 방대한 호스트프로그램을 매번 새롭게 컴파일해야 했으니 정말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다.

3.3. F/OSS의 시기


  • 89년. 경북대 동아리 ‘하늘소’ 결성. 12월 통신 풀그림 “이야기 1.0” 배포

  • 91~92년 KAIST 내의 리눅스 연구 모임 시작. 한국 리눅스 공동체 초기로 기록 여상

  • 91년. 송재경 한텀 제작. 이후 2.0은 xterm을 기반으로 99년 제작.

  • 91-96년. KAIST 쿠스 결성

  • 92년. POSTECH 플러스 결성

  • 92년. 월간 소프트월드 “X윈도우를 만끽하는 공개 유닉스시스템 Linux" 기사 게재 내배포본




리눅스와의 첫 만남에 대한 기록

iolo kldpbbs

(linux가) 등장할 당시에는 존재감도 없었다고 기억됩니다.

제가 처음 리눅스를 깔아본게... 93년인가 무슨 슬랙웨어였던것 같습니다. 무슨 잡지의 부록으로 나왔었는데 당시 주변에 시디롬을 갖고 있는 친구가 한명 뿐이어서... 모두들 하드를 빼서... 그 친구네 집에가서 복사해왔죠. 1배속 시디롬으로 그거 복사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것 같네요 그렇게 설치만 해보고 잊고 살았습니다.

warpdory kldpbbs

1993년에 SLS 배포판을 디스켓으로 몇번 깔아보고 때려쳤다가… 슬랙웨어 1.몇 버전을 다시 깔면서 리눅스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하이텔 리눅스 동호회 대표시삽도 해먹습니다. 뭔가 리눅스로부터 얻은 게 많습니다. 그건 바로 ‘재미’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재미있습니다. 프로그래밍에서 손 뗀지 몇 년이 지나서 코딩 한줄 못하지만 … 패치 한번 하려면 patch –p1 이었나.. 하면서 해야 하지만 재미납니다. 그리고 .. 지금도 리눅스 잘 쓰고 있습니다.



  • 93년. 웹의 본격적 소개 [[윤석찬 – 정보트러스트]
    • 국내 최초의 웹서버 (김병학, KAIST) - cair.kaist.ac.kr
    • 최초의 디렉토리 서비스 (동국대 컴퓨터학과 변정용 교수 연구실, W3C 국내 웹사이트 모임집)
    • 최초의 검색엔진( 김성훈, 대구대학교 까치네)
    • 공개된 최초의 웹BBS(충북대 이해원교수, CBUBBS)

  • 94년. 6월. 일반인을 위한 인터넷 서비스 개통
    • 한국통신 'KORNET' 10월
    • 데이콤 'DACOM InterNet', 11월
    • ㈜아이네트기술이 나우콤과 함께 '누리넷(nuri.net)' 서비스를 시작

  • 96년. 슬랙웨어를 기반으로 국내 최초의 한글화 배포판 – 알짜 슬랙웨어 3.0 배포 (이만용)
    • 9월 월간 프로그램세계를 통하여 “알짜 슬랙웨어 3.1” 배포
    • 97년. 1월. 월간 프로그램세계. 알짜 레드햇 4.0 (이만용)

  • 96년. 10월. 5일. KLDP(Korean Linux Documentation Project) 권순선의 개인 홈페이지로 출발.

  • 97년. KLUG (Korean Linux Users Group) 결성

  • 97년. 10월. 30일. 적수네 동네(Linux Sarang Net, 김병찬)

  • ??? GNU 선언문 번역 (하재원)

  • 98년. 3월. 오픈소스 솔류션 기업 리눅스코리아 설립 (한동훈) 눅스코리아

  • 99년. 4월. 25일. 연세대 강당에서 500여명의 리눅서가 제 1회 리눅스 공동체 세미나 개최

  • 99년. 9월. 해커스랩 프리 해킹존 개설
    • 상업성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 해커 공동체의 시작 여성

  • 00년. 5월. GNU Korea (송창훈) 활동 시작

  • 04년. 제1회 Code Fest 개최 (KLDP)

4. Issue적 기술


4.1. 내가 M$에 반감이 갖게 된 이유는


iolo kldpbbs

제가 MS에 반감을 가지게된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했습니다.

비주얼 C 1.5를 쓰던시절... CToolbar클래스가 없었습니다. 툴바라는 용어조차 정립되기 전이니까요... 그런데 VC++ 1.5와... 오피스(아마 6~7버전쯤 되지 않았을까요?)는 그걸 멋직게 쓰고 있었죠. 그래서... 저도 열씨미(!) 만들었습니다. MyToolbar가 만들어진거죠. 그런데 VC++ 2.0이 나왔을때 힘이 쭈욱 빠지더군요. MFC에 CToolbar가 추가된것입니다. 제가만든 MyToolbar은 아무 쓸모가 없었죠. 그런데 VC++ 2.0의 툴바는 MFC의 CToolbar와 무언가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도킹이 된다는 거죠. 떼었다 붙였다!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썬 혁신적이 었습니다. 아예 떨어져있거나 붙어있는 것은 많았지만 그렇게 떼었다 붙였다하는 건 거의 없었죠. VC++ 2.0과 Office빼고 말이죠(아마 Office 95였다고 기억됩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만들었습니다 MyDockToolbar를! 그러나 VC++ 4.0이 나왔을때... MFC에 떡하니 박혀나온 툴바를 보게되었죠. 이쯤 되니 좌절 보다는 화가 나더군요. 내가 VC++로 만든 어플리케이션은 항상 MS의 그것(만들때 사용한 VC++포함)보다 한발 늦다는 사실에 화가나더군요.

결국 전 자바 진영으로 급선회 했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델파이로 이것저것 해먹었죠. 비주얼씨도 유용한 수입원이었습니다. C++빌더도 그렇군요. 리눅스로 전향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니텔 프개동에서 공동구매한 알짜리눅스 6.0과 미지의 한글/X를 시작으로 리눅스와의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4.2. 내가 M$에 반감이 갖게 된 이유는


wincild kldpbbs

윗분이 M$ 에 반감을 가지게 된것을 사소하게 작성하셨는데, 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90년대 중반 동업자와 회사를 같이 하면서 국내의 잘나가던 중기업인 G 사로부터 제의를 하나 받았습니다. 제의 자체도 요상한 제의 였는데, 기술적인 난이도가 있는 제의 였습니다. 그 제의를 받기전 약 1년전에 대기업인 S 사로부터 기술내용은 다르지만 느낌이 같은 제의를 받은적이 있었습니다. 열쉬미 제안서를 만들어서 줬더니, 나중에 보니까 저희가 제안한 기술대로 지들끼리 했더군요. 그것이 기억이 나서 기술적인 해결방안은 있지만 하지 않겠다! 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담당자가 자존심을 건드리더군요. 못하니깐 그런소리 하는거 아니냐? 화가 잔뜩나서 처들어 갔습니다. 담당자와 1시간동안 싸웠더니 인정해 주더군요. 그리고 같이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개발하려는 목표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특별한 목적의 네트웍시스템이 었습니다.

플랫폼이 UNIX 인 경우는 쉽게 해결이 되었는데, M$ 인 경우 winsock 부분에서 해결되지를 않았습니다. 마침 그 G 사가 M$ 의 MSDN 최상위 레벨 (년간 기술료로 300만원정도 내는...) 을 보유하고 있어서 M$ 에 문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의를 하면 쓰레기 같은 자료만 수백MB 씩 보내오는 통에 담당자가 파악하는데 정말로 고생했습니다. 검토해보고 이거 아니다, 하고 다시 설명하면 또 그런 자료가 날아오고... 2달정도 그짓을 하고 나니, 한국 M$ 가 손들더군요. 자기네로서는 지원해 줄수 없는 기술이다. 그럼 빠지고 본사와 연결하라고 했더니, 그렇게는 안된답니다. 꼭 자기네가 중계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좋다. 해결방안만 알려다고... 미국 본사와 역시 같은 그짓을 1달을 하고서 나중에 날아온 결과가 무었이었나면 "귀하의 요청사항은 영업적인 이유로 알려줄수 없다!" 였습니다. 정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더군요. 그럼 지난 3개월동안 쌩고생만 한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젝트는 이미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포기한다면 십수억원은 족히 날릴판 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무모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공개된 LINUX 용의 TCP socket 을 M$ 용으로 다운그레이드를 시도 했습니다. 무모하기는 했지만 숱한 밤샘끝에 1개월만에 성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런칭을 했는데, 세상에... M$ 의 응용프로그램이 버전업만 하면 제대로 동작이 안되는것이 었습니다. winsock 위에서 돌아가는 M$ 의 응용프로그램이 끝자리 버전하나만 바뀌어도 우리가 제작안 TCP socket 에서는 안돌아 가는것 입니다.

그때에 M$ 가 얼마나 이기적인 회사인지 알수 있었습니다. 기술력을 무기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회사였던것이 었습니다. 그이후로 그때의 팀원 모두가 M$ 를 증오하는 개발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M$ 플랫폼 상에서의 운영은 포기하고 LINUX, UNIX 플랫폼에 한정하여 프로젝트를 종료시킬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 국내에서 언론매체들이 멋도 모르고, 빌게이츠를 영웅으로, 본받아야 할 인물로 부각시키는 것을 보면 아주 화가 납니다. 어린이들이 되고 싶은 사람으로 빌게이츠를 꼽는것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빌게이츠가 자선단체에 기부를 많이 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의 자선단체에 국한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국에 지원하는것은 형식적이요, 시늉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세계에서 돈을 벌어들여 미국만 불리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5. 참고문헌

5.1. 규칙


더 많은 자료가 쌓이기 전에 자료의 출처를 밝힐 방법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일단 KLDP bbs에서 추천된 링크들부터 정리하겠습니다. wiki에서 문헌참조를 어떻게들 표시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좋은 의견있으면 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본문에서 참고문헌을 인용할때는 름 혹은 약어 식으로 하면 적당할 듯 싶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같은 식이면 어떨까요?

  1. 여상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 리눅스 공동체는 1991, 92년 경 KAIST내의 ...
  2. 우리나라 리눅스 공동체는 1991, 92년 경 KAIST내의 ... 알려져 있다. 여상

물론 ed군님의 의도대로 실제 주인공분들의 이야기를 직/접/들을 수 있게되거나 그 주변분들로 부터 구전되는 전/설/들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좋겠지만, 우선 초기에는 잡지나 인터넷상의 자료들을 중심으로 정리하게 될 것같아서 이런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역시 skeleton은 기본 사실들을 정리, 나열하는 형태로 갖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5.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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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6-09-13 12: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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